책 후기

<미스 플라이트>_박민정 작가

cous 2024. 5. 25. 18:31

아빠, 여기서 실패하면 군말 없이 삶으로 돌아갈게요.
빛 들지 않는 방으로.
직장으로 갈게요.

 

 

"살해하고 싶었던 수많은 풍경들이 떠오르려고 했다."
-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지. 너무 적나라한 생각이라 글로 쓰기도 어려운 말인데.

"영훈은 그 모습을 다시 떠올린다. 뭔가를 떠올리고, 떠올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더구나 이렇게 앉아서는."

"혜진이 아니라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데, 혜진 말고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종종걸음을 걷는 간호사의 슬리퍼. 하얀 슬리퍼의 앞코에 거뭇하게 올라온 땟자국을 보면 그것 역시 바쁘게 살아 있다는 증거일 터라 질투가 났다."
- 혜진은 의식이 없다. 영훈은 혜진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온갖 살아있는 것들에 질투를 하고 있다.

"왜 아저씨는 예나 지금이나 불행하기만 해요?"

"거의 다 덜어 냈을 무렵에는 가장자리만 남고 가운데가 움푹 꺼진 연고를 보며 왠지 실패한 너 같다, 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문장이 많다.

"숫기 없는 녀석들은 그렇다는 이유로 버릇없는 행동을 하기 일쑤였다."
- 아주 찔리는 문장이었다.

소설 속에는 혜진과 영훈이 같이 영화를 보았다고 한다. 소설을 읽을 때면 궁금한게, 소설 속에서 언급된 영화들이 실제로 있는 것일까?

"정근은 하루하루를 죽이며, 거의 살해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유나까지 잃어버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유나는 다른 애들처럼 길을 잃거나 부모 손을 놓쳐 본 적도 없는 아이였다."

조금 읽기 힘들다. 책은 술술 읽히는데, 마음이 불편해져서.

"작은 조각이 모여 멋진 우주선이 되듯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원래 알던 못난 내가 아닌 새로운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어린 아이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 그러면서 또 공감이 되는 것이 슬프다.

"그때 영훈은 차에서 내려 혜진을 데리러 가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혜진의 직장도 집도 언제나 영훈과 가까웠지만 그녀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가끔 현관에 서서 와이프들과 어울리는 혜진을 보면 이제 막 전학 온 아이처럼 쭈뼛거리며 슬금슬금 일을 거드는 폼이 짠했다."

아무리 영훈이 유나를 좋아했다고 해도 이 일이 좋았을리가 없다. 아무리 영훈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처지에 있다고 해도 대령의 사적인 일까지 처리한다는 것이 수치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여보. 유나가 와. 기억나지? 우리 유나."

"혜진의 꿈에 유나가 어떤 이미지로 등장할지 영훈은 결론 내릴 수 없었다. 함께 웃고 즐거워하던 행복한 기억일까. 물론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전부 다 유나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영훈은 혜진의 꿈속에 끼어들었다. 어쩔 수 없어. 당신이 지독한 악몽을 꾼다고 해도. 여보, 유나가 죽었어. 자살했대. 믿겨져?"

"-주한아.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을게.
-뭘?
-수영."

"아빠는 사회인으로서의 나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걱정되었나요. 주한의 이야기를 듣는데 문득 울어 버리고 싶었어요. 나는 고등학교 때, 그 일 이후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어서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죠. 스무 살을 앞둔 내게 아빠는 어떤 당부도 하지 않았으니까."

"유나 자살했다면서요, 그러면서, 유나도 일찍 교회를 보냈다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 아니 어떻게 자살한 자식이 있는 부모에게 이런 말을 하지. 깜짝 놀랐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할 것도 같은 상황이구나. 너무 스트레스 쌓여...

"시간이 점프하다 오늘까지 온다. 명백하게 유나가 없는 오늘로. 주한은 시간을 되감기해 그날로 돌아갔다. 모두 잠든 새벽 곁에 누워 뒤척이던 유나가 있던 그날."
- 이 부분에서 눈물이 났다.

"창으로 새벽 어스름이 밀려 들어왔다. 까맣지 않고 조금 파랗다. 이 어둠은. 주한은 생각했었다. 주한의 팔을 베고 누운 유나는 곧 스르르 잠들었다. 그해 여름으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 멀리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줄 수조차 없죠."

"네가 준 소중한 아이디어인데 어찌 포기할 수가 있겠어?"

"인사하고 돌아서는 일행의 뒤에다 대고 아저씨가 한마디 했다. 하이고들, 담뱃값도 안 나올 짓거리들 하고 있네. 젊을 때다."
- 왜 사람들은 저렇게 말할까? 남들이 갑자기 회사를 관두고 여행을 가버린다든가,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있다든가하면 꼭 한심하다는 듯 말을 한다. 남들이 즐겁게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싫은 것처럼,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 주한아, 난 네가 군대 안 가서 좋아. 어쩔 수 없이 변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조금 무서워. 아니기를 바라지만.
-  아닐 거야. 전역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좀 예민할 수는 있겠지.
- 사람을 그렇게 쉽게 치는 아이는 아니었는데."
- 많이 공감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군대식 문화가 정말 싫다. 서열을 만들어서 부당해도 참아야 하는 문화, 폭력적인 문화. 학교는 군대와 닮아서 정말 끔찍한 기억들이었다. 화가 났다고 사람을 치는 행위에 폭력성을 느끼고 공포를 느끼는 유나가 공감이 많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밥상머리에서 앉아, 하며 똥군기를 잡던 자신이 먼저 떠올라 수치스러워지곤 했다."
- 나도 이런 똥군기가 정말로 싫다. 특히 부모들이 많이 하는 행동인데, 자식에게 서열을 확정지어주고 싶어서 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위가 상한다.

정근에게는 과거 후배가 자살한 사건이 있다. 하지만 정근은 그 죽음은 그의 선택이라며 동정하지도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하지만 유나의 죽음 또한 유나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정근은 안다. 왜 정근은 자신의 잘못을 딸의 죽음을 통해 깨달을까. 왜 유나는 정근의 잘못을 자신이 대신해서 계속 사과할까. 이런 극의 부조리가 현실의 부조리같아서 더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에게 배운 수많은 것들 중 가장 고마운 것도 그런 것이었다. 상대가 아픈 이야기를 할 때 쓸데없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지 않는 것."
- 나도 이 책을 통해 한 가지를 배웠다. 나도 쓸데없는 호기심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내가 책을 자주 읽는 이유가 여기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책에는 광주의 전남도청 앞에 있는 회화나무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뭔가 '전남도청'이랑 '회화나무'라는 단어가 익숙해서 검색해보니, 실제로 태풍으로 인해 나무가 고사했다고 한다. 요즘 광주와 관련된 책을 많이 본다. 책에 나오는 장소들을 가보고 싶다.

"여보, 유나 엄마가 왔어. 옛날에도 그랬다며. 유나 이야기 하기 전에 아기 이야기부터 했어다며. 오늘도 유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당신이 아픈 이야기부터 해. 유나가 죽었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영훈은 금세 그런 자신의 생각을 경멸했으나 돌이킬 수 없었다. 그것도 일부 자신의 진심이었다."

"헤진의 죽은 양친은 전부 명문가의 자식들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만큼의 불행을 유지하는 일도 힘들었을 것이다."

"나 자신의 일인데, 귀찮았어. 그 와중에도 아침에 눈을 떴는데 출근하지 않아도 문제없어, 란 생각이 들자 해방감마저 들었어."
-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귀찮아할 것이다. 이런 무기력함이 사실은 우울증일 것 같다. 나 자신의 일이어도 귀찮으니까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사실 그런 사람이 매우 많을 것이다. 이 소설을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수치스러운 경험이 끊임없이 나와서 정말 보기 힘들다.

"옛날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 회사에 다니는데도 여전히 마찬가지라고. 그 말을 하며 흘리던 눈물이 어떻게 거짓일 수 있겠어요. 아직도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아이는 자기 불행을 잘 표현했어요."

"아저씨는 회사가 사원에게 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몰라요."
"꾸며 내지 않은 진짜로 일어났던 비극을 이용해서, 하나의 허름한 인생과 그 사람의 진심을 이용해서."

"어디에 있든 유나를 생각하면 아찔한 상실감이 등줄기를 훑었지만 주한은 묵묵히 그 순간을 보냈다."
"머리통 밑으로 들어오는 아버지 손길을 느낄 때마다 주한의 마음은 번번이 가라앉았다. 아버지 욕을 몇 차례 더 들으면 전부 잊어버릴 수도 있겠다고 느낄 만큼."
- 이 부분을 읽다가 지하철에서 울뻔 했다.

"유나가 좌절하지 않도록 날마다 불러 즐거운 일들을 도모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려 애썼을지도 몰랐다."

 

"영훈의 납치에 대한 유나의 공모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위계질서를 인식하고 있는 조숙한 아이인 유나가 느껴 온 어렴풋한 반감이 가시적인 갈등으로 점화되는 사건인 셈이다."


사실 내가 이제 지겨워하는 이야기가 한 여자가 죽고 나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납치된 여자아이가 유괴범과 잘 지내는 이야기이다. 대부분 이런 이야기들에서 여성의 불행을 담아내는 시선이 많이 불편했고 유괴당한 어린 여자아이가 왜 유괴범들(높은 확률로 남성)에게 연민을 느껴야하는지가 불편했다. 이 소설은 이 두 가지가 포함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좋았다.

"그는 소설 쓰기란 근본적으로 현실을 살해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소설 쓰기라는 잔혹한 행위를 가능한 최선을 다해 덜 무례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다짐 속에서 쓴다."

"결국 한 편의 허구에 불과했던 <미스 플라이트>는 우리 모두가 이 세계에 공모하고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현실에 기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