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후기

<트로피컬 나이트> 조예은 작가 1 (스포 주의)

cous 2024. 6. 6.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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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컬 나이트

Tropical night : 열대야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조예은 작가의 모든 책을 다 읽기이다. <칵테일, 러브, 좀비>,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을 이어서 <트로피컬 나이트>를 읽고 있다.

 

 


1. 할로우 키즈

"전 사실 괴담을 좋아해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잖아요. 괴담이라 불릴 만큼 말도 안 되는 일에도 사실은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가끔 생각이 납니다. 어른들도 세상에서 사리지고 싶은 순간들이 있잖아요. 아이들이라고 다를까요."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 나를 상처 주지 않는 곳에 가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사라진 재이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재이가, 핼러윈 행사 주인공인 드라큘라 역을 하고 싶다고 손을 든 건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지 못했죠."
- 참 슬픈 이야기이다. 그렇게 조용한 재이도 사실은 주인공이 하고 싶었다. 그럴 때는 그냥 울어야 하는데. 유치원생을 떼를 써서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나이인데. 하지만 재이는 그러지 못하는 아이이다. 유령 같은 아이이기 때문에.

"그런데 제가 일하면서 느낀 건데요, 어른도 짜증 날 정도의 상황에서 애가 가만히 있는다는 건 그리 좋은 게 아니에요. 그 지루한 시간을 재이는 무슨 생각을 하며 견뎠을까요."

"이상하게도...... 재이의 발목이 계속 흐릿해보였습니다."

7p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짧은 단편소설이다. 그런데 이 짧은 이야기가 너무 매력적이다. 유령 같은 아이인 재이와, 재이와 닮은 유치원 선생님.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재이를 지켜보던 유치원 선생님처럼 나도 이런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간다.

 

 


2. 고기와 석류

생고기를 먹는 괴물과 그 괴물을 집으로 들인 혼자 사는 60대의 여자.

"오랜만에 방문을 열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습기, 그리고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남편의 냄새가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러니까, 죽어가는 남편의 냄새가."

"옥주의 머릿속에 안락사, 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그건 내가 당하고 싶은 건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옥주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옥주는 괴물을 묶어두는 대신 선택을 회피하는 쪽을 택했다."

"삶을 계산할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로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줄은 몰랐다. 이 나이를 먹도록 아직까지 이런 격정의 감정이 남아 있다는 데에 또 놀랐다. 이건 단순한 외로움하고는 다른 문제였다. 아니, 외로움이긴 하지만 좀 더, 좀 더 뭐랄까...... 결말에 관한 문제였다."

"결국 운이다. 운은 사람을 가리지 않아. 세상은 불공평하지. 하지만 어차피 멋대로 돌아가는 게 세상의 이치고 운이라면, 나에게만 이렇게 가혹할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

"집에 돌아와 낯선 이와 눈을 마주치는 게 이리도 두렵지 않은 일이었다니. 죽어가는 눈을 보지 않는 게, 살아 있는 눈을 보는 게 이렇게 심장 뛰는 일이었다니."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옥주의 이야기가 많이 공감되었다. 나도 내 미래는 생각하면 혼자일 것 같아서. 마지막이 어떻게 되려나 걱정이 될 때가 많거든. 그렇다면, 나 역시도 석류가 무섭지 않고 반가울 것 같다.

"야속하면서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괴로웠다. 더 이상 보살필 것은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먹이고, 씻기고, 다듬어주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는데."

시체를 먹는 소설은 <구의 증명> 이후로 처음이네. 조예은 작가의 책을 읽을 때는 항상 내가 가지고 있던 윤리적인 규칙들은 살짝 무시하고 읽어야 한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죽는데 유쾌한 글을 쓰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자들을 쉽게 죽이고, 오락거리로 만드는 작품이 많았는데. 나만 이 소설들에서 남자들이 죽는다고 불편해하고 있나 싶다.

 


3. 릴리의 손

'틈'으로 넘어간 이방인들의 이야기.

"꼭 죽은 것처럼 태어나버린 그 순간."

"하지만 사건이 끝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남들은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다던데, 연주는 자신이 꼭 교통사고로 인해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굳이 태어나지 않았어도 되는 삶을 말이지."

"은행에서 소량의 생활비를 대출받은 날, 연주는 홀로 붕 떠 있던 세상에 비로소 착지했다고 느꼈다. 사고로 인해 태어난 그는 빚의 무게로 인해 이 땅에 발을 딛고 서게 된 것이다."

"몸이 가벼워지고 붕 뜨는 순간, 연주는 자신을 지탱하던 뭔가가 떨어져나가는 기분을 느낀다. 이쪽이 아닌 다른 세계와 자신을 이어주던 동아줄이 싹둑 끊겨버리는 기분을. 끔찍한 단절의 감각을. 그리하여 아주 낯선 곳에 떨어지게 되는 절망감을."

"자신이 한 번 죽었던, 그리고 또다시 태어난 현장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하지만 잊는 게 낫다는 건,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 함부로 내뱉으면 안 되는 말이라고 릴리는 생각했다. 그건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삶을 버티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인간의 안쪽을 채우던 것들이 한순간에 증발했는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방인들은 평생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리워하곤 했다."

"이상한 세상에 잘못 떨어진 기분."
"아주 중요한 뭔가를 잊어버린 기분."

"주기적인 우울이 찾아왔고, 그 우울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으로 인해 치유받기도, 더 상처받기도 했다."

우울해서,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는 게 도대체 뭘까. 사실 그래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따지면 나는 그렇게까지 우울하거나 외루운 적이 없나보다. 아니면 누구도 안 만나고 그냥 우울하고 외로운 채로 있었던 걸까.

"우리가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지?"
"그런데 우리라는 게, 하나는 나야."
"넌 어디에 사는 누구라, 나를 찾아오지 않아?"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특이하다면 특이한 어떤 얼굴이 그려졌다. 주근깨가 수놓아진 콧잔등, 옅은 눈동자를 가진 누군가. 이름도 모르는 너."

"존재하는지조차 확실치 않으면서 이토록 선명한 그리움이라니."

"연주가 살다 온 세계를 엿본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진짜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날들이 있었어. 그럴 땐 되게 난감해. 엄마도 자기가 왜 우는지 모르는데 그냥 막 눈물이 난대. 엄마도 모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그냥 가만히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나는 엄마를 평생 완전히 이해할 수 없겠구나. 당연하잖아. 본인도 본인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어렸을 때는 그 사실이 엄청 힘들었는데 나이가 들고 생각해보니까, 그건 사실 당연한 거야. 어떻게 타인이 타인을 완전히 이해해? 텔레파시가 통하지 않는 이상."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이해 못 하면 뭐 어때. 내가 있는 것만으로 이해 같은 거 없어도 힘이 된다는데."

 

생각해 보면 틈이 없는 지금의 세상에서도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이방인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혈연 관계라도 내가 남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해 못 하면 어때. 서로가 있는 것만으로도 이해 같은 거 없이도 힘이 되는데.


"세 번째에야 정말로 땅이 진동하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고개를 틀어 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뭘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몸이 가벼워지고, 붕 떴다가..... 점점 멀어졌다. 연주로부터."

매일같이 꿈꾸던 감각은 바로 틈으로 들어가던 감각이었다.

"지금 릴리와 연주를 유일하게 이어주는 것은 손."

"이 일을 하면서 언젠가는 이방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상황이 이렇게 갑작스레 들이닥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원래 모든 일들이 그렇게 벌어지는 것 아닌가."

"이방인이 된다고 죽는 거 아니야."
"그래도 싫어. 안 돼."

"릴리는 그것을 붙잡기 위해 팔을 뻗었다. 어쩌면 다시는 잡지 못하게 될 연주의 손. 저걸 붙잡아야 하는데."

"다가오는 불빛을 보며 떠올린 것은 단 두 글자의 이름. 연주."

"연주가 된 릴리"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축하를 하고, 함께 울고 웃기도 했다. 만났다 헤어지고, 화내고 포기하며 관계를 이어갔다."

"눈물을 닦아주었던 이의 장례식에, 홀로 걷는 산책길에, 홀로 밥을 먹고 다시 홀로 자고 일어나 눈물을 닦은 아침에"

"너에게 보낼 수가 없으니, 사실 이건 편지가 아닌 일기에 가깝지."

"너는 고전 영상 자료에나 나올 법한 병원에 누워 있고, 낯선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잠들어.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갑자기 울지. 사람들은 너를 내 이름으로 불러."

"내게 달려 있던 손이 너에게 있다면. 내 신경을 공유한 일부를 네가 만진다면, 우리는 아직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한순간 나의 온 신경을 쏟는다면. 아주 찰나의 감각은 너에게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다시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새로운 틈이 발생할 때마다 일종의 계시 같다고 느껴. 저 안쪽에는 네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세상이야. 또 네가 나와 함께였던 20대일 수도, 내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인 50대일 수도 있는 세상이야."

"매일매일 어떤 굴레 안에 있는 것 같아. 너도 이럴까? 처음엔 비극이었다가, 다음엔 희극이었다가. 한때는 내 안의 비극이 고갈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어."

"사실 답을 알고 있어."

"그리고 내 꿈속의 너는 내 이름으로 불리며 늙어가고 있어."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나도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읽었다. 시간을 반복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틈이 생기면 아주 먼 과거나, 아주 먼 미래로 가니까. 이방인이 다시 이방인이 될 수 있으니까. 이방인은 자신을 다 잊어버린다는데 이방인이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하나만 기억하고 그 이름으로 산다면 어떨까? 이런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연주가 바로 그런 아이였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를 잇는 명작이 나왔다. 조예은 작가는 타임루프물을 정말 잘 쓰는 것 같다.

가끔은 나를 다 잊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인생을 리셋해서 다시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안 좋은 기억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이방인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산다면, 지금의 나보다 더 용기있게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모두 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너무나도 슬픈 일이고.

 


4. 새해엔 쿠스쿠스

너무너무 좋은 소설이 생겼다. 사실 너무 읽기 힘들었다. 공감되는 부분도 많고, 숨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너무나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결말 부분에선 울컥했고, 이런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요즘 조예은 작가 책이 너무 좋다. <트로피컬 나이트>의 단편소설을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풍만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욕구가 충족되는 느낌? 이게 행복이구나. 내가 살면서 이런 책을 읽다니?! 이걸 시도때도 없이 느끼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읽다보니 앞에 3개의 소설은 결이 비슷한데. 여기서부터 달라진다. <새해엔 쿠스쿠스>는 조예은 작가 특유의 판타지나 공포 요소가 없다. 심지어 책 뒷표지에 '젤리소다 맛 괴담집'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단편소설은 좀 결이 다르다. 뭐랄까. 오히려 극현실주의의 이야기이다.

연말과 새해가 되면 생각날 책이 하나 더 생겼다. <경애의 마음>과 <새해엔 쿠스쿠스>. <경애의 마음>은 1월 1일에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이야기가 있다. 둘다 씁쓸한 면이 있지만, 너무 좋았다.

"막 자고 일어난 탓에 다시 잠이 오지는 않으니, 오롯이 버텨야 했다. 버텨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저 문을 열어 다시 엄마를 받아들이고 나면 나는 또 질 테니까. 엄마의 눈물과 비교와 한탄과 후회에 또 지고 말 테니까."

"엄마는 메시지도 엄마같이 보낸다. 애정과 우려가 듬뿍 묻어나는 문장에 눈물이 고이기도, 숨이 막히기도 했다."

"꼭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음악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엄마가 두드리는 문소리는 비트에 묻히지 않고 심장을 타격했다."

"엄마가 전화를 걸 때마다 음악이 끊겼지만 차단은 할 수 없었다. 나는 엄마를 차단하고 싶은 게 아니다."

"간신히 봉해놓은 마음의 뚜껑이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처럼 달그락거렸다."

"누구 하나 들르는 이 없는 원룸에서 홀로 순간과 감정을 곱씹다 보면 늘 같은 물음을 마주했다. 나는 왜 나를 괴롭게 한 그들보다도 엄마가 더 원망스러운 걸까."

"애정과 배신감은 정비례한다는 걸."

"나는 늘 누군가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해."

"고모의 이야기 속 언니는 동화 속 공주처럼,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행복하고 완벽하기만 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고모는 어떻게 언니의 일상을 저리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
"어쩌면 고모의 이야기 속 언니는 사실 고모가 되고 싶은 존재가 아닐까."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고모는 그저 연우 언니 자랑을 하며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언니를 통해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블로그에서 여러번 한 말이지만,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나의 행복은 내가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자식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더 큰 불행을 가져오는 것이다. <스카이캐슬> 같은 드라마가 이런 이야기를 보고 만들었어야 했는데.. 아니 이런 이야기가 드라마가 되었어야 했는데.

"나는 맞은편에 앉아 배를 자르는 엄마의 얼굴을 바라봤다. 대결에서 억울하게 진 선수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얼굴이 유독 고모와 닮아 보였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연우 언니가 사실 나와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는 고모를 미워했고, 유리는 엄마 때문에 언니를 미워했다. 하지만 사실 서로서로 닮아 있었다.

"각종 대회의 수상과 스펙, 성적으로 정의된 언니는 더 이상 나에게 하나의 얼굴로 와닿지가 않았다."

"한 달, 1년, 10년, 20년가량을 거슬러 올라간 나는 어느 찰나를 기억해냈다. 최악의 명절로 남은 설 당일. 어른들의 고함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던 이불과 이불 안에서 맞잡고 있던 손을."

"우리는 한참을 같이 울고서 가게를 나왔다. 새벽의 공기는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가웠지만 감정에 매몰된 우리를 구해주지는 못했다."

"나는 늘 복수하는 상상을 해. 그리고 내 생각에 너랑 나는 닮았어."

"언니의 주정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언니는 겨우 망해라였지만, 나는 죽였어."

참 죄책감을 느낀다는 게 신기하다. 나도 누군가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했는데. 별로 죄책감을 안 느낀다. 다들 착한 것 같다.

"기억난다. 여태껏 어디에 꽁꽁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선명히 기억났다.'

"먹으러 가자. 쿠스쿠스."

"그래서 새벽에 걸려 온 몇 통의 전화와 메시지들을 보고도 응답하지 않았다. 답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그건 내가 지금껏 느꼈던 어떤 감정보다도, 가장 강렬하고 커다란 배신감이었다."

"하지만 언니는 사라졌지. 홀연히 어디론가. 어제와 오늘, 나는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지만 바뀐 건 없었다."

"누군지 궁금했으나, 먼저 물을 용기와 의욕이 없었다."
- 용기와 의욕, 지금 유리가 얼마나 심약한 상태인지 알 수 있다. 나는 정신병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아마 우울한 상태일 것이다. 가장 믿고 사랑한 사람인 엄마에게 배신당했고, 직장에서는 명백한 괴롭힘을 당했다. 집에 틀어박히고 메시지를 보낼 용기와 의욕조차 없는 유리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너무나 슬펐다.

"언니는 갔구나. 정말로 그곳에 갔구나. 알은척을 해야 하나? 뭐라고 물어야 하지? 짧은 시간에 머릿속에 무수한 질문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결국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타인에게 내 소리를 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이불 속에서 노트북으로 모르코 관련 다큐를 틀어놓은 채 음악에 휩싸여 있으면 꼭 언니와 함께했던 최악의 명절이 떠올랐다. 모두 난장판이었지. 어른들은 서로를 상처 입히려 안달 나 있었고. 그래도 이불 속은 꽤 포근했던 것 같다."

"나는 그래서 좋았다. 언니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 끝까지 멋지게 도망친 언니도 나처럼 엉망진창인 때가 있다는 사실이."

"내 걱정을 하긴 하려나? 진심으로? 나는 아직 이런 부질없는 짐작을 물고 늘어질 정도로 엄마를 많이 사랑한다."
"새해인데 떡국은 먹어야지. 끼니 거르지 마."
"엽서를 주워 머뭇대는 사이, 문밖에서 밉고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울었다.

"내일은 쿠스쿠스 먹을 거야. 새해 복 많이 받아."
"올해의 마지막 날에 받은 새해 첫 덕담이었다."

"너도 먹으러 올래?"
"응. 갈게."

 

나의 버킷리스트 중에 새해에 쿠스쿠스먹기가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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