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로피컬 나이트> 조예은 작가 2 (스포 주의, 긴 글 주의)책 후기 2024. 6. 17. 10:25
트로피컬 나이트
Tropical night : 열대야
5. 가장 작은 신
조예은 작가의 글을 내 생각보다 더 예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칵테일, 러브, 좀비>가 처음이 아니었다. <미세먼지>가 처음이었다. 왜냐 하면, 책 뒷표지에 널 등쳐먹어서 미안해~로 시작되는 문장이 너무 익숙하게 좋았거든. 그래서 뭐지뭐지. 하면서 단편 소설 제목들을 봐도 생각이 안 나는 거야. 왜냐면, 난 이 소설의 제목이 '먼지의 신'인 줄 알았어. 책 읽은지 오래되서 내용도 거의 까먹었고. <릴리의 손>을 이어서, <새해엔 쿠스쿠스>까지 읽고 <가장 작은 신>을 읽을 때 행복이 최고조를 달했다. 한 문장, 한 문장 꼭꼭 씹어 먹었다.
"하여튼 사람들은 제 일이 아닌 것에는 뭐든지 건성이다."
<새해엔 쿠스쿠스>를 이어서, 방에 틀어박힌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여기 수안이는 2년이나 방에 있다. 그리고 나는 히키코모리 인물이 나올때마다 과몰입한다. 너무 감정이입이 되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공감이 된다. 반대로 요즘 나는 완전 집 밖에 나댕기고 있긴 하지만...
"올 테면 오라지. 나는 어차피 이 안에서 나가지 않을 테니까."
"혼자 지내는 날이 길어질수록 마음속에 벽이 생겨났다. 아주 작은 먼지들이, 온몸의 구멍을 파고들어 무수한 거절의 기억을 심어놓은 듯했다."
원래 사람을 만나지 않을수록 부정적인 감정만 커지는 것이다. 좋은 기억들이 저편으로 도망가고 상처받은 기억들만 남는 것이다. 그런 기억들이 더 혼자 있게 만들고 사람을 만나는데 어려움을 준다. 거절을 당한 기억들이 발목을 붙잡고 도전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사람을 만나서 거절당하기 싫어서 아예 사람을 만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거절의 기억이라는 문장이 좋았다. 회피형 인간이며, 한때 꿈이 부자 히키코모리였기 때문에 공감이 많이 되었다.
"누군가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과거를 배회하던 수안은 순식간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요즘 내가 많이 하는 생각이다. 현실을 살자. 과거도 미래도 아니고, 지금을 살자. 다시 보니 미주는 처음부터 수안을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미주가 문을 두드려서 수안이 상상을 멈추었지만, 실제로도 미주는 수안이 현실을 살아가게 만들었다.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이런 시간에 미주가 자신을 찾아온 건지 짜증이 치솟았다. 하나 완전히 내칠 용기도 없었다. 외면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조예은 작가는 히키코모리였던 적이 있는걸까? 어떻게 이렇게 회피형 인간의 마음을 잘 알까. 거절할 용기도 없는 것이 그들이다.
"수안은 무채색의 거리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삭막한 풍경. 곪은 피부는 나았고, 상처는 흔적이 되었지만 수안의 시간은 그때에 멈춰 있었다."
"종말? 그런 게 올까 과연? 3년 전, 하늘이 회색으로 물들었을 때도 사람들은 종말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결국은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먼지바람이 휘몰아치는 오늘날까지 다들 질기게 살아 있잖아."
"종말은 쉽게 오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삶은 계속되고, 매달 부여되는 할당량도 여전하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미주가 보험, 사기, 다단계는 아니길 바랬는데. 속상하게도 역시나였다.
"그런 외톨이들은 쉽지만 어려운 상대야. 외로움을 숨기지 못하는 주제에 방어벽은 어마어마하게 높거든."
"문득 수안이 자신을 어떻게 느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불쾌한 침입자. 평온한 상태를 훼방 놓는 낯선 이."
"불쌍하고 멍청하고 착한 수안."
"미주는 장례식장에 가지 않았다. 자신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노인의 죽음이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먼지바람처럼 무슨 일이 벌어질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변수는 눈앞의 저 게으름뱅이밖에 없다."
"정말이지 수안은 너무 쉽고, 한심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세상엔 왜 사람을 거르는 시스템은 많으면서 걱정거리를 걸러주는 건 없는지. 나는 왜 늘 걸러지는 쪽이고, 내 안의 아무것도 뜻대로 걸러낼 수 없는지."
- 공기청정기를 보며 미주가 한 생각이다. 이걸 보니까 <카스테라>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가 생각났다. 거기엔 푸시맨이 삶에 지쳐 이렇게 생각한다. "때로 새벽의 전철에 지친 몸을 실으면, 그래서 나는 저 어둠 속의 누군가에게 몸을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밀지 마, 그만 밀라니까. 왜 세상은 온통 푸시인가. 왜 세상엔 <푸시맨>만 있고 <풀맨>이 없는 것인가. 그리고 왜 이 열차는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가." 내가 정말 좋아하는 문장이다. 박민규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단편소설이기도 하고.
"거짓말이다. 무서운 건 먼지들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에 미주도 포함인가?"
"나도 고여 있어도 될 만큼의 여유가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미주의 얼굴이 어딘가 슬퍼 보여서 수안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러니까, 네가 다니는 회사 다단계 아니야? 혹은, 너 나 등쳐먹으려던 거 아니었어?"
"따위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는 말이다."
"사람을 제대로 대한 지 오래된 수안은 낯선 침입자를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집요하게 관찰했고, 덕분에 그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주에게 수안이 수십, 수백 중의 1이라면 수안에게 미주는 그 자체로 꽉 찬 1이었다."
"매일같이 방문하는 미주를 막지 않은 이유는, 인정하기 싫었으나 외로웠기 때문이다. 자기 잇속을 챙기러 왔다 해도 상관없을 만큼."
"하지만 미주에게 따져 물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정도의 힘도, 용기도 없었다."
"미주가 영구 회원 가입 동의서를 내미는 날이, 이 모호한 관계가 끝나는 날일 테니."
"미주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회사에서 갑자기 연락이 와서...... 수안은 괜찮다고 답했다. 정말 괜찮았다."
"수안이 손쉽게 주문서를 작성할 때마다 미주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먼저 무슨 말이든 꺼낼 용기는 없었으므로 그런 일상은 계속되었다."
용기가 없는 수안이 참 마음에 든다.
"미주의 게시물을 넘길수록 수안은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미 도망친 상태라 도망칠 곳이 업다."
미주가 다단계니 조심하라는 동창의 문자가 수안에게 온다. "동창회 와서 애들 여럿 등쳐먹고 잠수 탔어." 등쳐먹는다는 단어가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수안의 답장이 좋았다.
"알고 있으니까 신경 꺼."
"수안은 대부분 한심하고 가끔 사랑스럽다."- 요즘은 이렇게 한심하지만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좋다. 웹툰 <흔한햄>의 주인공도 그렇다. 매일 노력하고, 매일 실패한다. 미래가 두렵다고 찡찡거리는 모습이 한심하면서도 묘하게 공감이 된다.
"지금까지 자신이 망하게 한 수많은 사람들은 뭐란 말인가."
"고시원으로 돌아가서 꼭 죽으러 가는 기분으로 짐을 쌌다."
"만약 경찰에게 연락이 온다면,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만약 이대로 미주를 잊는다면, 지금 당장은 나가지 않아도 된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겠지. 수안은 아무도 오지 않는 방에서 홀로 눈을 감는 자신을 상상했다."
- 미주는 죽음을 생각해 본 적 없는 수안에게 죽음을 생각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미주가 수안의 집에 찾아왔을 때 수안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고독사하였을까봐 신고를 하려고 했다. 물론 미주는 수안이 문을 열게 만드려고 소란을 피운 것일 것이다. 하지만 수안이 계속 이렇게 집에 있다면, 본인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까 상상하게 만들었다.
"수안은 뒤돌아서서 좀 전에 자신이 빠져 나온 집을바라보았다. 허무할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회피형 인간들이 지금 당장 해봐야 할 일이 이것이다. 두렵고 용기가 없어서 미뤘던 일을 한 번 해보면 좋겠다. 해보고 실패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도 된다. 그런데 아마 생각보다 별 거 아닐것이다.
"수안에게 메시지를 보내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려, 미주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세 글자를 써 보냈다. 유서라도 쓰는 기분이었다."
"구하러 오는 이는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매사가 거짓이던 자신을 누군가가 구하러 온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끝. 종말이 오기도 전에 끝."
"그리고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도. 분명 거친 숨소리인데 어딘가 말랑말랑하다."
"'널 등쳐먹어서 미안해. 넌 대부분 한심하고 가끔 사랑스럽지만 잘 살 거야."
- 단편소설 내용은 거의 까먹었지만, 이 문장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너무 좋았던 문장이었다. <트로피컬 나이트>를 재미있게 봐서 더 좋아졌다.
"통쾌함이나 후련함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어차피 삶은 계속될 테고, 그 사실이 버틸 만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읽는 동안, 내내 마스크가 쓰고 싶어지는 소설이었다.
6. 나쁜 꿈과 함께
"앞의 그림들 속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캐릭터였고, 나는 좀 상처 입었던 거 같다."
악몽을 꿈꾸게 하여 인간의 공포를 먹는 몽마가 자신을 묘사한 캐릭터를 보고 한 말이다. 프레디 크루거로 묘사된 것에 상처를 받은 악마가 웃기다.
"영화에서처럼 손톱칼로 그 애를 위협하고 킬킬 웃고 중절모를 쓴 채로 밥을 먹었다. 슬픈 식사였다.'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무수한 상상력 중에는 뒷걸음치다가 때려 맞히는 경우가 꽤 많으니까."
"악몽 속 인간은 늘 격렬하고, 그들은 살아 있으므로. 공포를 느끼는 것 또한 살아 있어야 가능하므로 온기를 지닌다."
"늘 명심하는 부분이지만, 실수라는 건 결국 저지르기 때문에 실수인 것이다."
"그 방은 나에게 거대한 미련 덩어리처럼 보였다. 미련이라는 감정이 기이한 형태의 중력으로 작용하는 공간."
"정이 많다는 건 오랜 시간 쌓아온 나의 데이터로 보았을 때, 멍청하다는 뜻과 동일하다."
뭔가 은성이 몽마를 본 것 같기도 하다. 몽마는 본인의 눈에도 본인이 보이지 않는데.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말랑이며 따뜻하다. 그 부드럽고 말랑하고 따뜻한 피부가 나를 감싸자 죽을 것 같았다."
- 몽마는 살아 있는 것과 몸이 닿으며 프레디 크루거처럼 몸에 화상이 생기듯 아프다. 이런 설정이 재미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온기가 있고, 그 온기는 몽마의 피부에 타는 듯한 고통을 준다.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말랑이며 따뜻한데, 그 따뜻함이 몽마를 아프게 하다니.
"은성의 방을 보았을 때 그는 사소한 것에 의미 부여를 크게 하는 성격일 테고, 그런 성격은 쉽게 죄책감을 가진다. 드물지만 아예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 죄책감은 공포와 아주 긴밀하게 이어져 있으니까. 어린 시절에 소중한 뭔가를 상실한 경험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흔적을 남긴다."
"좀 보잘것없고 쓸데없이 귀여운 기분이 들지만 뭐 어때."
- 이 단편집의 소설들에는 한심한데 귀여운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비루한 곰 인형의 악몽에 비해 은성의 감정들은 꽤 농도가 짙어서, 오랫동안 씹고 음미하며 즐길 수 있었다."
"한참을 안겨 있었다. 잠자리를 지켜주는 작고 귀여운 곰 인형처럼. 프레디 크루거가 아니라, 곰 인형처럼."
"너무 오래 뽑기 기계 안에 있었던 탓에 색이 바래고 실밥은 정교하지 못한, 멍청한 얼굴의 병아리였다. 그게 꼭 은성과 닮아 보이기도 하고."
- 몽마가 뽑게 도와준 인형은 멍청한 얼굴의 병아리였다. 은성과 닮은. 은성은 참 한심한데 귀엽다. 멍청해보이지만, 조금씩 나아졌으면 좋겠다.
"은성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뭐랄까, 울려고 했는데 눈치 없이 인형이 나와버려서 울지도 못하게 된 얼굴이었다."
"우리 집에 가자."
"나는 사실 은성에게 한심하고 멍청하다고 할 군번이 못된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저 말이 꼭 나에게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어제와 같이 곰 인형이었으면 좋겠다. 더 누더기여도 좋고 다른 인형이어도 되니 최대한 불쌍하고 귀여웠으면 좋겠다."
- 악몽이나 먹는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는 몽마와 한심한 은성이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결국엔 몽마는 은성에게 또 악몽을 보여주겠지만.
7. 유니버설 캣숍의 비밀
"광목 커튼 너머로 비치는 햇살은 따스했으며, 체다가 구경하기 좋아하는 베란다 밖에서는 어린애들이 뛰노는 소리가 났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 장면을,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하고 싶다고. 평생"
"이번엔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봤다. 마치 내 생김새를 꼭꼭 눌러 담으려는 것처럼."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은하의 이야기이다. 생각해 보니, 이름도 은하네. 고양이 별이 나오는데. 난 이런 연관성이 좋다. <공공연한 고양이>에 수록되었던 단편소설이라네. 그 책도 킵해둔 책이긴 했는데. 나는 강아지보다는 고양이가 좋다. 길거리에서 길고양이를 보면 신난다. 그런데 고양이하고도 낯을 가려서 아는 체는 못한다. 고양이 털 알러지도 심해서 고양이 있는 집 가면 힘들고.. 책을 읽다 보니, 나는 고양이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나 싶었따. 고양이를 잃어버리고 매일 우는 마음은 어떨까. 동물을 길러본 적이 없어서 그 죄책감을 모르겠다. 심지어 은하가 실수로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죄책감을 가지지. 인간들이란.. 길 고양이를 보면 좋지만, 물이나 먹을 것을 챙겨 준 적은 없는 나는 아마 모를 사랑일 것이다.
"캣숍 아래에 이런 공간이 있다니.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진짜 꿈이면 안 될 일이다. 어쩌면 이곳에서 체다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눈이 팅팅 부어서 못생겨졌어, 은하."
"지구는 우리가 지내기에 마냥 좋은 행성은 아니었어."
- 지구는 고양이가 살기에 좋은 행성은 아닐 것이다. 사람도 살기에 좋지는 않다. 그렇지만, 고양이에겐 더 안 좋겠지.
"너와 좀 더 함께하고 싶었는데."
"그럼 다시 돌아오지 않아?"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감촉이었다. 그대로 체다를 안아 도망치고 싶었다. 고양이 별의 사정이고 뭐고, 그냥 나랑 살면 안 돼?"
고양이 별의 사정이고 뭐고, 그냥 나랑 살면 안 돼? 이 문장이 참 좋았다. 짠하다가도 너무 귀엽고 좋았다. 그러니까. 그냥 같이 살면 안되나.
"나는 우주선으로 향하는 노란 고양이의 늠름한 뒷모습을 지켜봤다."
"떨어지는 별똥별이 아니라 날아오르는 별똥별들. 나에게 와줘서 고마웠어."
8.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조예은 작가는 수미상관과 시간 여행물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 이 단편 소설도 구성이 완벽하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와 <릴리의 손>와 같은 결의 소설이다. 끝까지 숨죽이고 보게 만들고, 끝까지 다 읽으면 모든 퍼즐이 완성된다. <칵테일, 러브, 좀비>까지는 내가 스포 없이 포스팅할려고 노력했는데. 이건 안 된다. 좋은 점을 다 말하려면 어쩔 수 없어.
"이렇게 죽음이 흔한 세상임에도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것과 직접 목격하는 건 천지 차이더군요."
성에는 유령이 있다고 했다. 유령이 누구인지는 끝까지 읽으면 알 수 있다.
"그 순간의 기억은.... 뭐랄까, 그 피 묻은 장식품들과 같았어요.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을 비집고 불쾌하고 끔찍한 것들이 나타났죠."
다시 읽으니까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렇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 많다. 이 요리사가 전에 본 시체는 블루구나. 영주의 머리에서 도끼를 빼내는 솜씨가 좋은 이유는 이걸 여러 번 반복한 뒤였겠구나.
"서재는 꼭 바깥 공간과 완전히 분리된 다른 시공간 같았죠. 그 안에서 영영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 어떻게 보면, 요리사가 제대로 느낀 것이다. 서재에는 시공간과 관련된 비밀이 있으니까. 그리고 이 요리사가 썸머였다. 썸머라는 것을 알고 나서 읽으니 또 느낌이 다르다.
"청록색 드레스와 굽이치는 푸른빛 곱슬머리, 그리고 바닥에 낭자한 살점과 핏물. 창밖에는 함박눈이다 못해 폭설이 내리고 있었죠.'
이 소설은 함박눈이 반복된다. 이 소설은 함박눈, 크리스마스, 별 장식품, 도끼.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작은 별, 과도, 초밥이 계속 반복되고 생각난다.
"하지만.... 부인은 3년 전에 죽었잖아요. 나타날 수 없는 사람이잖아요."
"아이는 아직 작고 붉은 짐승에 가까워 보였는데, 그 낯선 존재가 부부나 산파가 아닌 바로 자신의 품에서 울음을 그친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블루가 태어난 시점으로 이야기는 돌아간다. 여기 노파가 나온다. 노파를 잘 기억해둬야 한다. 무수한 사랑을 받고 자라지만 외로움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무수한 피를 손에 묻힌다고 했다. 구천을 떠돌 거라고 했다.
"사탄들은 인간이 기쁨과 행복에 취해 방심했을 때를 파고든다."
"일정량을 넘어서는 연이은 행운은 사람을 초조하게 하는 법."
"블루의 머리카락은 노파의 말대로 변해갔다. 어떤 날에는 순풍이 부는 잔잔한 파도 같았고, 또 어떤 날은 폭풍을 머금은 바다처럼 굽이쳤다."
"블루는 전과 다름없이 웃고 떠들고 일하고 뛰었으나, 그런 블루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다른 감정들이 피어났다."
"자신의 딸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다음 주에 옆 마을에서 큰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썸머와 함께 간다면 무척 좋을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썸머는 블루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함께 축제에 가자고 했다."
- 블루와 썸머의 이야기가 참 좋았다. 하지만 그 이후, 살인사건을 목격한 요리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둘이서 한 약속들을 이뤄지지 못했다. 다른 시공간의 블루와 썸머는 이루었을까? 요리를 배우고 조각품을 팔고 싶었는데. 블루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함께 가자고 하는 썸머였는데.
그리고 한 점술가가 축제에서 블루에게 점을 봐준다. 이 점술가도 잘 기억해야 한다. 블루는 이 "여자가 어딘가 익숙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원래 미신이란 무지몽매한 것들이 믿는 것 아닌가."
"영주는 눈앞의 블루에게서 그 안의 반짝임과 처연함, 우울을 함께 보았다. 그 모든 것이 합쳐지자 블루가 이전에는 본 적 없는 아름답고 기이한 존재처럼 와닿았다."
"영주님의 사소한 규칙이나, 귀족가의 식사 예절 같은 건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롭고 편안한, 그래서 행복해 보이는 모습으로요."
"외로움은 블루를 자꾸 과거에 머물게 만들었다. 이미 지나온 시절을 곱씹고 곱씹으며 하루를 났다. 그러다 영주가 돌아와 현실로 끌어 올려지는 순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썸머였다. 결혼 이후로 처음 나누는 대화이자 매일같이 그리워했던 위로."
"블루는 이전보다 덜 외로웠으나, 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언제 남편의 눈에 띌까 전전긍긍했을 뿐더러, 눈앞의 썸머가 꼭 한순간에 멀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젊고 유능한 영주이므로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대신 마녀라고 불리는 자신을 탓할 뿐이다."
"시험을 한다면 시험당해주지."
"블루는 지옥을 내다보는 심정으로 계단을 올라,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블루는 죽어가는 블루는 목격했다. 찰나에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하다."
"그 순간, 문 너머 자신의 목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며 피를 뿜어낸 그 순간, 문 반대편에서 넘어온 블루는 알 수 있었다."
"정수리에 내리꽃히는 불안을 무릅쓰고서 블루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블루는 눈앞의 광경을 부정했다. 여기는 문 너머이고, 이건 현실이 아니야. 이런 걸 보려고 문을 넘은 게 아니야."
"나는 살고 싶어. 블루는 소리 내어 말했다. 나는 살 거야. 아주 질기게, 끈질기게 살 거라고."
"하지만 이건 오로지 블루만 아는 진실. 숨겨진 과거와 미래의 진실."
- 블루가 너무 외로웠을 것 같다. 영주가 자신을 살해한 것, 그리고 여자들을 살해한 것은 오직 블루만 안다. 심지어 자신을 살해한 것은 미래의 진실. 블루만 알고 있다.
"썸머의 마지막 표정은 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도 입 안에 가뒀다."
"블루는 그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무한한 경우의 수로 존재하는 세계에서의 우리를. 비록 이쪽의 자신은 시공간을 떠돌겠지만"
"그 틈을 넘나들며, 자신이 영주를 죽인 덕에 함게할 수 있게 된 다른 블루와 썸머의 삶을 질투하며 블루는 늙어갔다."
- 자신이 자신을 질투하게 되는 상황이 너무 슬펐다. 블루는 항상 외로웠다.
"블루는 과거의 자신을, 그러나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은 자신을 불러 세웠다."
"썸머는 3년 동안 무수히 그날의 크리스마스를 곱씹었다."
"블루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갔을까. 왜 나를 데려가지 않았지?"
- 블루에게만 집중하느라 썸머를 잊고 있었다. 그러면 맨 처음 세계에서 영주를 죽이고 떠난 이후 남겨진 썸머는? 썸머는 혼자 남아 3년 동안 그날을 무수히 반복했다.
"돌아오지 않는 블루를 그리며, 그 순간을 무수히 곱씹었다. 블루는 어디로 갔나. 왜 나를 데려가지 않았나. 블루는 아직 존재하나."
"오늘은 축복받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니까. 블루가 태어나고 사라진 날이니까."
"수많은 자신을 스쳤고, 먼 곳에서 사랑했던 이들을 바라보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곁을 지켜줄 이는 없었다."
"찰나, 생기를 잃어가던 블루의 눈에 빛이 내비쳤고, 블루의 머릿속에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던 순간이 선명하게 펼쳐졌다. 도끼와 피와 질투와 후회와 괴로움에 잊고 살던 어떤 순간들이. 트리에 걸린 장식품처럼 반짝이며 존재하던 기억이. 맞아. 난 한때 이런 기억들로 살았다. 나를 이루고 나를 움직이게 만들던 시간들이 있었다."
"스스로를 되찾은 블루는 너무 오래 부르지 못해 입 안에 갇혀버린 이름을 비로소 떠올렸다."
"오랜만이야, 썸머."
어떻게 이런 글을 쓰지.
작가의 말
"첫 만남의 웃음과 녹음이 떠오르는 계절이네요. 무더운 여름의 기억 한편에 제 이야기가 함께라면 무척 기쁠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영원을 믿지 못하지만, 이야기 안에서만큼은 영원을 상상할 수 있으면 합니다."
이 책을 여름에 읽어서 정말 다행이다.'책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윌라] 윌라에서 읽은 책 후기 (불안, 크리스마스에 생긴 일 등) (6) 2024.08.15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 <일 년>, <답신> (0) 2024.08.03 <트로피컬 나이트> 조예은 작가 1 (스포 주의) (3) 2024.06.06 <미스 플라이트>_박민정 작가 (0) 2024.05.25 <네 이웃의 식탁>_구병모 장편소설 (0) 2024.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