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조를 기다리며> : 우리 숨박꼭질 기억해?책 후기 2025. 6. 30. 23:30반응형
서점에 가면 항상 책 표지 때문에 눈길이 갔다. '우리 숨바꼭질 기억해?'가 제목인 줄 알았다니까. 위즈덤하우스에 나오는 저런 표지의 책들은 다 핵심 문장이 책의 표지에 있는데 이게 조금은 헷갈리더라고. 하여튼 제목은 <만조를 기다리며>. 얇고 재미있어서 또 후루룩 읽었다. 호러 소설인 줄 알았는데 사랑 소설이었던 건에 대하여..
어둠 속에서 우리는 죽어가고 있었다. 고작 숨바꼭질 때문이었다.
어른들은 우리를 찾지 못했다. 어쩌면 찾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육지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우리는 정말이지 착실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정해가 프러포즈를 받은 날, 우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우영은 죽기 전 정해에게 보내려고 했던 핸드폰 메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숨바꼭질 기억해?"
정해는 우영의 죽음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우영이 절대 자살을 했을리가 없다고.
우영이 정말 자살을 택했다면 유서를 남겼을 것이다. 약속을 기억하냐는, 보내지도 못한 문장 한 줄이 아니라 제대로 된 요구를 적었을 것이다.
그러니 알아내야 한다.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어떤 의문도 미심쩍음도 남지 않도록. 소화를 하기 위해서는 씹어야 하는 법이다. 이와 혀로 감각해야 하는 것이다. 정해는 이 섬에 아직 남아 있는지 사라졌는지 모를 이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러니 영산에서 기다려. 아직 떠나지 말고 날 지켜봐.
상실의 냄새 하지만 아직 눈물은 나지 않는다. 눈물은 모든 일을 받아들인 후에야 흘릴 수 있는 것이다.
정해는 배 위에서만큼이나 울렁이는 마음을 뒤로하고 이음새를 벌려 펜던트를 열었다. 지나간 세월이 그 안에 박제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20년 전이었다. 그대 정해는 한창 죽고 싶은 열두 살이었다.
외할머니를 따라 섬에 온 열두 살, 정해는 우영을 만나 친구가 된다. 엄마와 아빠는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돈 때문에 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서 정해는 항상 불안했다. 엄마도 아빠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버려질지도 모른다고. 정말로 엄마는 떠나버렸고, 외할머니와 지내게 된 정해에게 외할머니는 말한다. "네가 정하렴. 돌아갈 거니, 여기 함께 있을 거니? 어차피 어디에도 네 엄마는 없어" 고작 열두 살의 정해는 죽고 싶었다.
우영은 산지기의 딸로, 그 역시 산지기가 될 운명이었다. 그리고 죽으면 바다가 아니라 영산에 묻히고 싶어했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는 정말 헉했다. 조예은 작가는 어쩜 이런 글을 쓰지. 또 엄청나게 재미있는 책을 찾았구나 생각했다.우영은 정해를 정말 좋아했다. 정해가 하자고 하는 놀이는 모두 좋다고 해주었다.
우영은 정해의 모든 걸 좋다고 했다. 우영과 노는 동안에는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해와 우영의 숨박꼭질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정해는 정말 죽고자 했다. 열두 살짜리 아이가 자살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이 멋진 자살 계획은, 서투른 복수의 시나리오는 너무 두렵다는 것이다.
정해는 죽음을 얕봤다. 무섭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다.
바닷물이, 죽음이 저 밑에서 찰랑였다.
그런데, 유령이 아닌 우영이 정해를 찾아왔다. 우영이 찾아왔을 때, 눈물이 날라 했다. 정해는 발이 지저분해지는 걸 싫어해서 갯벌에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우영이 정해에 대해 너무 잘 알아... 그런데도 결국 정해를 찾은 사람은 우영이다.
하지만 찾아야 한다고는 생각했어. 내가 찾지 않으면 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거든.
산에서 저승의 경계를 넘어버린 걸까? 아니면 파도에 휩쓸린 걸까? 그럴 수 있지. 바다에 둘러싸야 있다는 건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우영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레이스 원피스에 잔무늬 코트를 입은 우영은 말했다. 넌 계속 더 멀리 가는구나. 나는 돌아가야겠어.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섬이지.
- 이 부분을 읽을 때도 헉했다. 우영의 옷은 꼭 숨바꼭질을 하던 날, 정해가 입은 옷과 닮았다. 정해는 숨바꼭질을 하던 날, "레이스 원피스에 여름용 체크무늬 코트를 걸쳤다." 정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우영은 정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계속 더 멀리 가는구나. 우영은 아직도 영산에 머물러 있는데. 정해는 계속 떠났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미련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많더라. 슬픈 사람들은 더 많고.
아이러니하게도 우영과 연락이 닿지 않았던 기간 동안 정해는 계속해서 우영을 생각했다. 과거의 우영도 내 연락을 이렇게 기다렸겠지?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우영은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에 잔 체크무늬 코트를 입고 있었다.
- 이날은 옷은, 숨바꼭질을 하던 날 입은 옷과 더 비슷하다. 이제는 우영을 생각만 해도 울컥한다. 우영이 정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겠으니까.
그러게. 감정이란 절묘한 상황이 만들어낸 착각이니까. 필요한 걸 주는 사람과는 사랑에 빠지기 쉬울 것이다. 사람은 어쩌면 말 한마디, 1분이 채 되지 않는 찰나의 친절만으로도 사랑에 빠질 수 있으니까. 이런 문장이 너무 좋았다. 우영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는 사람은 결국 정해가 아니라 최양희의 아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해가 우영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해와 우영이 서로 사랑함에도 서로에게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그는 섬에서 늘 누군가를 떠나보내기만 했으니까.
- 그런데 우영은 남편을 잃었다. 우영은 섬에서 늘 누군가를 떠나보냈다. 아버지도, 정해도, 남편도. 왜 우영에게만 이러는지...
오래된 인형, 썩어가는 옷 더미, 곰팡이가 핀 신발과 깨진 그릇들, 이 돌산의 구멍 안쪽을 빼곡히 채운 죽은 자의 흔적과 산자의 그리움. 이룰 수 없는 염원들. 바다내음을 닮은 슬픔의 냄새.
- 어떻게 이런 문장들을 만들어내지.
지난 사건의 목격자가 이번 사건의 피해자라니. 그리고 하필 당신이 목격자 죽음의 목격자라니. 기묘하군요.
- 놀랍게도 우영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은 복은이었다. 그리고 복은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은 정해가 된다. 형사는 정해에게 이렇게 말한다. 형사의 말이 뭔가, 영화 속 대사 같았다.
바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아. 그저 휩쓸어갈 뿐이지.
"괜찮아, 정해야."
이번에도, 우영의 목소리였다.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다 괜찮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떠올려보면 늘 그랬다. 실제로 괜찮아지는 건 없었지만 그런 기분만으로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얻곤 했지. 등껍질바위에서 보냈던 밤처럼.
피곤에 찌든 상실의 냄새를 폴폴 풍기며, 가슴에 난 구멍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얼굴
"두 번째로 같이 보는 일출이야."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너랑 보는 바다가 제일 예쁜 것 같아."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는 정말 울었다. 우영과 보는 바다가 제일 예쁜 것 같다는 정해. 정말 유령이 된 우영이 같이 있었던 걸까.
이제 슬슬 조예은 작가의 책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도서전에 가서 조예은 작가도 보았다. 하지만 싸인은 받지 않았지. 한 번 보기만 하고 돌아갔다. <만조를 기다리며>는 정말 곱씹게 되는 책이다. 좋은 문장도 너무 많고, 뭔가 울컥하는 게 있어.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미스테리가 다 풀리고 다시 읽으면, 다시 보이는 게 있어서 좋은 것 같다. 퍼즐 조각이 맞춰지니까. 진짜 얇고 재미있는 책이라 너무너무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오래만에 너무 좋은 책을 만났다. <적산가옥의 유령>도 선물 받았는데, 이 책은 군산에 가서 읽고 싶다.
반응형'책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의 기쁨과 슬픔> : "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어요?" (5) 2025.05.01 <예술하는 습관> : 여성 예술가의 루틴 (7) 2025.04.12 <우주 여행자를 위한 한국살이 가이드북> : 한국에서 살아남기 (2) 2025.03.20 입속 지느러미 : 아, 환상 없는 현실은 얼마나 삭막하고 지루한지. (2) 2025.02.06 스노볼 드라이브 : 최악을 상상하는 건 너무 쉽게 매력적이다. (1) 2025.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