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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의 유령> : 죽은 자는 가여울 뿐이지,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책 후기 2026. 3. 4. 00:31반응형

원래는 군산에 가서 읽고 싶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나서 그냥 읽어버렸다. 나중에 군산에 갈 일이 있다면 다시 읽어야지! 조예은 작가의 고향이 군산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항구로 발달되어 적산가옥이 많은 곳. <시프트>에서도 어렸을 때 이야기를 했는데, <적산가옥의 유령>에서도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네. 항상 바다냄새가 나는 유년시절을 보냈다니 뭔가 특별하다. 좋아하는 작가라 그런가 괜히 다 특별해 보이고 그러네.
호러 소설은 아직도 익숙치 않다. 글로 무섭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영상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그냥 글자인데. 호러 소설은 공포감보다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게 만드는 게 매력적인 소설인 것 같다.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상상하면 무서웠지만 글자라는 점이 책을 덮으면 공포가 바로 사라져 좋았다. 앞으로 호러 소설을 많이 읽어야 겠다. 무서운 이야기는 보고 싶은데, 이미지는 너무 무서워. 조예은 작가의 소설답게 잔인한데 또 애잔한 이야기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허약해지는 게 당연했다.
본채와 별채가, 수도관과 정원과 나무 기둥이 하나의 기관처럼 이어져 유기적으로 숨과 기억을 주고받는다. 그런 집은 자신의 벽에 깃든 모든 역사를 기억한다.
이 아름다운 집의 유일한 그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이웃과 가족들이 조용히 죽었다. 죽음과 이별이 너무나 태연하게 벌어지는 시기였다.
나는 하루하루 절망의 기운에 압도되었다.
내가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그 누구도 고통받는 가여운 이들을 구원할 수 없으며 세상에는 너무 많은 외롭고 허무한 죽음이 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가장 두려운 건 내가 그 무력감과 죽음에 적응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갑작스러운 행운은 경계해 마땅했다.
꼭 기대에 어긋나는 선물을 받은 것처럼 서운한 기분을 피할 수가 없었다.
미물의 죽음에 대한 감상이란 어쩜 이리 얄팍한지. 하기야 사람 목숨 역시 미물처럼 사그라지는 세상이었다. 내 목숨도 그 잉어와 다르지 않겠지.
어떤 트라우마로 인해 한번 생긴 상처를 놔두지 않고 계속 건들면 상처는 계속 싱그러워졌다. 기억과 마찬가지로 고통의 흔적 역시 들춰낼수록 벗어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한밤의 정원은 모든 구분선이 사라지고 검은 덩어리로 변한 것처럼 어두웠고, 달빛은 먹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달빛조차 없는 정원에서 나는 저 인영을 어떻게 알아본 걸까?
악몽은 모든 꿈이 그렇듯 난데없이 찾아와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고, 나는 풀 곳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문제는 여유가 생기자 쓸데없는 생각과 헛된 감정이 차올랐다는 것이다.
하나 바로 그 폐쇄성에서 시작된 유혹이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아주 견고하게 유지되는 어떤 조직의 중심자가 얼결에 달려 들어온 외부인을 가엽게 여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돈을 갈기갈기 찢고 싶으면서 동시에 입안으로 처넣어 삼키고 싶었다. 누구도 나에게서 뺏어갈 수 없게, 오로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알 수 없는 동물의 척추뼈와 한 무더기의 고통이, 엉망진창으로 널려 있었다.
살이 무사히 붙는 과정은 살이 찢어지는 순간만큼 괴로워. 치료란 원래 고통을 견디는 과정인 거야.
내 안에 남은 건 이제 익숙한 고통과, 아직 벌어지지 않은 모든 장면과...... 때를 기다리는 마음뿐이야."
-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유카타에게는 그저 고통과 때를 기다리는 마음밖에 없다.
당신은 이 집에 살게 될 거야.
"내가 죽고 난 후에."
시공간을 초월한 듯 아주 느리고 동시에 너무 빠른 찰나였다.
죽은 자는 가여울 뿐이지,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고작 이만큼의 예지와 돈으로 바꾸거나 구할 수 있는 건 전무했다. 좀 더 빨리 절망할 뿐이다.
그의 태평함이 부러웠다. 아니, 죽일 듯이 미웠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유타카가 가질 수밖에 없는 끔찍한 충동과 살의에 공감했다. 그 무력함이란.
오늘 정도는 이 막연한 희망과 기대에 몸을 맡겨도 되지 않을까?
원해서 벌어지는 일은 거의 없어.
내가 지나온 단어들. 언어에 담을 수 없는 마음들. 이미 잊어버린 것과 아직 잊지 못한 것.
소설은 그럴듯한 거짓말을 정성 들여 지어내는 작업이다. 이야기는 책이라는 물성으로 존재함과 동시에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 이런 문장이 너무 좋다. 소설이 자꾸 좋아진다.
외증조모의 적산가옥을 물려받은 외손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외증조모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그녀가 쓴 소설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다. 어떤 저택에서 비밀의 공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외손녀인 현운주도 비슷한 일을 겪게 된다. 이 적산가옥에는 유령이 있고, 매일 꿈에서 운주를 괴롭힌다.
현재 현운주의 이야기와 일제강점기의 외증조모, 박준영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나온다. 일제강점기답게 절망이 가깝고, 무력함이 가득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유령을 존재를 알고 나자 공포감보다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특히 엔딩을 보고는 코끝이 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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