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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드라이브 : 최악을 상상하는 건 너무 쉽게 매력적이다.책 후기 2025. 1. 23. 17:34
민음사의 이 젊은 작가 시리즈를 아주 다 도장깨기 할려나 보다. 하지만 조예은 작가잖아. 안 볼 수가 있나. 무조건 봐야지.
녹지 않는 눈이 내리고 나서의 이야기.
이 눈은 "소량 접촉 시 발열, 구토, 가려움, 발진, 호흡곤란 등 일반적인 알레르기 반응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난다." 한 여름에 눈이 내리자 신나서 눈을 맞던 운동장의 아이들이 곧 소리를 지르며 학교로 뛰어들어오는 장면은 텍스트로만 봐도 재난을 목격한 것처럼 긴박했다.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요즘의 세상처럼. 그래서 스노볼이 싫었다. 작은 손짓으로도 뒤집어지는 세상이 도무지 아름다워 보이지가 않았다.
최악을 상상하는 건 너무 쉽게 매력적이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그건 내 오랜 습관이기도 했다.
최악의 최악을 상상하며 심장을 미리 단련해 놓으면 막상 실제로 뭔가 닥쳤을 때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다. 미리 울어 두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나는 공부는 잘 못하지만 감이 좋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예감, 내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이 뒤틀리고 있다는 직감 같은 것. 나는 최악을 대비해야 할 때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날의 눈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삶이란 모를수록 행복하고 알수록 불행한 거라고. 모루, 듣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네 재능은 복이니 너는 최대한 오래 무지하라고.
손바닥의 흉이 깨끗이 사라진 이후에도 가끔 그날의 꿈을 꿨다.
그리고 그 꿈의 끝에는 늘 불쑥 다가오는 손이 있었다.
우리는 그보다 더 가끔 눈이 마주치곤 했지만 어째선지 인사를 나누는 사이까지는 되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달랐고 시소의 양 끝처럼 가까워지기 힘든 사이였다. 분명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는 걸 자각했지만 어떨 때는 그 애가 나에 비해 너무 무거운 것 같았고, 또 어떤 때는 내가 너무 낮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가끔은 말을 걸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기도 했다. 기회는 찰나였는데 후회는 며칠을 갔다.
이이월과 다시 대화를 나눈 건 졸업식에서였다. 그날 내린 눈은 오랫동안 녹지 않았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한순간의 동정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얄팍한 감정을 발판 삼아 나는 이이월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나는 매일 출근하는 엄마를 보며 내가 엄마를 죽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너무 투명하게 망해 가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 백영시는 특수 폐기물 매립 지역으로 선정되었고, 너무 자연스럽게 도시는 망해갔다. 떠나지 못한 사람들, 실직한 사람들은 쓰레기 매립지와 소각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백영시의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평균수명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이런 세상에도 호황인 업계가 있긴 하구나 생각했다. 쓰레기 같다,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사실이 묘한 위안이 되었다.
- 백영시의 납골당은 호황이었다.
눈 아래 세상은 전부 다른 색을 띠고 있지만 눈 덮인 세상은 어디나 비슷한 결로 망해 가고 있다
언젠가 그 구덩이에 먹혀 버릴 거야.
- 어린 아이가 구덩이에 폐기물과 동물의 사체를 버리는 걸 보고 이런 상상을 한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
나는 새 강아지와 헌 강아지에 대해 생각했다. 트렁크에 널브러져 있을 갈색 봉투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 아빠는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도 그냥 새 강아지를 사주면 되겠지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내뱉을 때의 눈빛을 나는 오랫동안 곱씹었다. 틈만 나면 사탕처럼 입안에 넣고 굴렸다.
이월은 새엄마와 엄마라는 말을 섞어서 쓴다. 새엄마는 조금은 이월의 슬픔에 공감하는지 알았더니, 너무 잔인했다.
그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일련의 행동들을 반복할 때면 때에 따라 수련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최면에 걸린 것처럼 멍한 상태에 빠지기도, 나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센터에서 돌아가는 버스에서 모루는 과거 등하굣길에 버스를 타던 기억을 떠올린다. 너무 평범한 일상을 그리워한다. 책 속의 묘사가 평범한 내 일상과 비슷한데도, 되게 먼 이야기 같았다.
시간은 흘렀으나 우리 대부분의 성장은 가짜 눈이 내리기 시작한 그 시절에 멈춰 있었다. 직원들은 어른의 얼굴을 하고 애처럼 웃곤 했다.
모루와 이월이 유진과 관련되어 있는 점이 재미있다.
문득 이 드라이브가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도 계속 잘 수 있을 텐데. 자다 일어나도 계속, 계속 달리고 있다면 무척 좋을 것이다.
그때 처음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내가 나를 구별할 수 있게 조금이라도 밝아지고 싶다고.
- 이월이 탈색을 하게 된 이유가 마음 아프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차라리 엇나가는 아이로 보이고 싶어한 게.
처음엔 우스웠다. 그들이 뭘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닌데. 이상한 건 내가 아닌 나를 둘러싼 것들인데.
진짜고 가짜고는 어떻게 구별해? 폐기물과 친구를 구별하는 법도 모르잖아 너는.
- 전형적으로 정신병을 가진 사람들이 겪는 혼란일 것이다. 죽은 하루가 살아 움직이는 게 보이는데, 자신이 맞다고 생각한다.
눈에 뒤덮인 학교를 응시했다. 별것 없었던 학창 시절에 대한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 별것 없었던 학창 시절이라는 게 왜 이렇게 좋지. 이월에게 있어서 학창 시절에는 좋은 추억이라는 게 딱히 없다. 하지만 모루에 대한 기억은 있다.
"이이월! 나랑 사진 찍자."
이모가 아프다는 말을 들어도 울지 않는 모루와 엄마가 죽어도 울지 않는 이월이 닮아서 더 마음 아팠다.
"좀 생각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 생각 많이 해 봤자 뭐 해? 이렇게 이상하게 굴러가는 세상에. 우울하기나 하지. 안 그래?"
"모루야. 백모루. 내 조카."
이렇게 하루가 멀어질 때면 어김없이 연구소의 일이 떠올라 함께 달릴 수밖에 없었다.
모루와 이월의 6월의 그날이 각자의 시선으로 전개되니까 재미있다. 모루만 이월이 특별했던 것이 아니었다. 모루의 담임이 급하게 뛰쳐나갔던 이유도 이월 때문이었다니.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도 다 얽혀져 있으니까 재미있다.
하늘은 맑았는데 불쑥, 밑도 끝도 없이,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새 강아지를 사 주겠다던 그때처럼.
- 아빠는 이월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새 강아지를 사주겠다고 위로할 때 처럼, 좋은 학교로 전학이나 가자고 말한다.
스노볼이 왜 이모의 차에서 발견되고, 이사장실에도 있었을까 궁금했었다. 우연인지 알았는데 하나하나 다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가정. 살아있다.
- 첫 번째 가정으로 이모가 살아 있다면 왜 없어졌을까 메모하던 모루는 두 번째 가정에 대해서는 메모를 하지 못한다. 죽었다는 단어를 적지 못한다. 적지 못하는 모루의 마음이 어땠을까.
나는 이번에도 최악을 상상했고 최악 이후의 삶을 가정했다.
만약 이모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를 찾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이 망망대해의 세상에 혼자가 되겠지. 아무도 없는 설원을 홀로 활보하게 되겠지.
140페이지 정도를 지나면서 급격히 더 재밌어진다.
그 자리에 놓아두고 들여다보지 않았던 과거가 밀려왔다.손으로 잡으면 녹아 없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라 단단히 손에 쥐어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 너무 재미있다. 하필, 녹지 않는 눈송이가 내리는 시대에 이런 말을.
돌아오지 않을 사진 속 세상을 추억하는 일이나 이모를 잃어버린 후에 이모를 쫓는 일 같은 건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학생이 없는 공간임에도 학교 특유의 냄새가 여전했다. 익숙한 향기는 과거를 미화한다.
불안할 때면 이 모든 게 가짜이고 환청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루가 계속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불길한 기운도 늘 내 곁에 있다고. 그러나 아무도 하루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이 기운도 그저 곁에 머물다 아무 일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그래 봤자 하루의 소리는 저들에게 닿지 않을 텐데. 그럴 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하루를 잃을 수는 없었다.
한 번도 집 밖에서 살아 본 적은 없지만 스물두 살은 어른이니까.
센터를 학교에 비유하며 그리워하는 듯한 문장이 계속 반복된다. 이월은 심지어 학교에 많은 추억이 있는 아이도 아닌데. 고등학교 때쯤부터 눈이 와서 학교도 못가고 강제로 아무것도 못하게 되었으니. 좋아하는 학교가 아니라도 일상이 그리울 수 있겠지. 그래서 그런지 센터는 정말 학교 같다. 센터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은 쉬는 시간에 친구들끼리 놀던 모습과 비슷하다. 녹지 않는 눈이 내리고, 몇 년동안 아이들은 나이를 먹었지만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은 것처럼 성장하지 못한 것 같다. 모든 게 멈추었으니까.
망한 세상에 홀로 그대로인 것들이.
- 모루는 이월이 그대로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이월도 모루를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살이 트던 말던 입술이 갈라지던 말던 관심 없었지만 그 안의 백모루는 좀 궁금했다.
- 이 부분이 특히 재미있다. 모루의 이야기와 이월의 이야기가 반복되는데 연달아 등장한 마지막 문단들이 특히 재미있다. 모루는 이월을 보며 욕심을 내기 시작하고 이월은 모루를 보며 궁금한 게 많아진다.
신기한 일이지. 전부 똑같은 작업복에 방독면을 썼는데도 그 애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흔하고 흔한 사과 향 사이에 숨어서 그 애의 기척에 반응했다.
- 포도향이 나는 보습제를 줘버리서 이월에게만 포도향이 난다. 그리고 모루는 방독면을 썼는데도 그 냄새를 맡고 그 애를 알아보고 몰래 관찰하고 있다. 이건 그냥 사랑이지 않나.
모루는 이월이 센터에 들어온 날과 이모가 사라진 날이 같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월의 스노우볼까지.. 궁금한 게 많다. 하지만 그보다 이월과 친해지고 마음이 더 크다. 갑자기 나타난 이월이 모루를 뒤흔든다.
갔으면 돌아오겠지. 그럴 거야.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간 게 괘씸하지만 기다려야지. 그리고 돌아오면 반겨 줄 거야.
"응. 돌아올 거야. 분명히."
그 말은, 그 얼굴은 지금껏 내가 맞닥뜨려 온 어떤 것보다도 확신에 가득 찬 것이었다.
나는 늘 셋이 친하면 제일 덜 친한 하나 쪽에 속하는 애였는데 이월 앞에서는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만 쟤를 알아차리고 나만 쟤를 신경 쓴다. 나는 네가 수상해도 그만큼 네가 좋아서 이렇게 다가가려 노력하는데, 네가 포기한 것보다는 내가 포기한 것이 훨씬 많을 텐데.
나는 이이월을 의심하는 걸까 믿고 싶은 걸까? 어쩌면 그 둘 다.
그런데 너는 나한테 궁금한 게 고작 그따위란 거지. 내가 궁금한 건 존나 많은데 이이월의 태도는 그런 내 마음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것 같다.
언젠가부터 분노와 후회 외의 감정에는 늘 죄책감이 뒤따랐다. 그 올가미 같은 기분에서 벗어나 들뜨고 싶었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이월과 단짝친구처럼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어땠을지를 계속 상상하는 모루가 마음 아프다. 그런데 이월도 같은 상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이는 건 폐허가 된 아파트 단지. 나는 현실로 곧장 끌어 올려졌다.
죄책감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서 자꾸만 이월을 다그치게 된다. 발바닥에 박힌 유리조각처럼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나를 아프게 찌른다. 빼내려면 바닥에 주저앉아 내 가장 밑바닥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잘 빠지지도 않는다.
망한 세상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면 좋은 것들만 생각하고 싶다.
"너 진짜 별로야."
짜증 나고 재수 없는 이이월.
- 아니 이 말에 너무 사랑이 묻어 있다.
사실 한동안 이월과 그랬던 것처럼 실없는 이야기나 하고 싶었다. 길 잃은 마음이 도착한 곳은 겨우 이런 작은 바람이었다.아니 이거 너무 로맨스 소설이야. 연애소설이야. 너무 달달해.
무엇보다 이곳에는 백모루가 있었다.
둔하기 짝이 없는 작업복을 입고 방독면을 쓴 탓에 다들 비슷해 보일 텐데 그중에서 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귀찮게 굴지.
사실 버티는 것과 기다림은 같은 말이다.
변하지 않는 사실 같은 건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지, 중요한 게 아니다.
아주 길고 혼란한 꿈을 꾼 기분이었고,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슬펐다.
- 이월은 그 모든 일을 겪었음에도 모루와 함께 있던 것이 좋았다. 자신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는 죄책감을 모루에게 가지지만, 그래도 그런 일들이 있어서 지금 모루와 함께 있게 된 거니까.
모루는 미간을 구기며 이제 와서 도망갈 생각은 말라는 둥의 악당 같은 대사를 내뱉고서야 멈췄다.
- 이 부분은 읽을 때 웃음이 실실 나왔다.
나는 이 여정에 목적지 따위가 없으면 좋을 것 같았다. 목적지가 있는 여행은 지루하니까.추천의 말_김초엽 소설가
한때 습관처럼 말하던 '다 망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다시 생각했다. 아침이 되면 한순간에 모두가 눈을 감는 평온한 멸망 같은 것은 없다고, 이 소설은 거듭해서 말해 준다. 멸망을 눈앞에 두고도 사실은 죽지 못해 꾸역꾸역 살아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모두 외면하는 멸망의 진실이다.SF 소설가가 역시 추천의 말을 써주는 구나. 녹지 않는 눈이 계속 내리는 세계관이라니. 너무 매력적이다. 드라마로 만들기 딱 좋은데. 가짜 눈은 제작비도 많이 들진 않을 것 같은데..
추천의 말_인아영 문학평론가
녹지 않는 눈, 전 세계를 덮어 버리는 눈, 일상을 망가뜨리며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 사람과 동물과 쓰레기와 진실을 모두 감추어 버리는 눈, 그 재난의 한가운데에도 반짝이는 마음들이 있다.
<해가 지는 곳으로>도 생각나고, <델마와 루이스>도 생각나고. 그 보다는 달달하고 순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너무너무 좋았다. 책을 읽다가 좋아서 진짜 까무러칠 뻔했다. 조예은 작가의 책은 항상 기대를 하고 봐도 더더 좋다. 읽으면서 심장이 떨렸다가 내가 더 설렜다가 녹지 않는 눈이 마음에 내린 것처럼 간질간질한 기분이 계속 들었다. 궁금한 것은 스노우볼이 맞지 않나? 왜 스노볼로 했을까?'책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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