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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2
    책 후기 2024. 2. 17. 18:50



    5. 카밀라 수녀원의 유산_천희란

    천희란 작가도 내가 한 번도 읽지 못한 작가이다.

    "라우라는 글씨를 읽을 줄 알면서도, 갓 빤 베갯잇처럼 포근하면서도 상쾌한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려 그 무리에 섞여 앉고는 했다."

    카밀라 수녀원은 수녀원은 아니지만 그렇게 불린다. 여자들만 모여사는 곳, 오갈데 없고 어떠한 폭력이나 취약한 상황에 처한 여자들이 모여사는 곳. 이 곳에서의 하루하루를 상상하는 것이 재밌었다. 카밀라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도서관에 데려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좋았다. 라우라가 카밀라를 사랑하던 그 마음이 너무 따듯했다.

    "저택은 하나의 도시, 국가, 혹은 그보다 더 넓은 세계처럼 여겨졌다.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전하고 자유롭고 풍요로웠다. 놀랍게도 누구도 자신이 할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았고,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원한 세상이 딱 이게 아닐까? 나도 저런 저택에서 저런 여자들과 같이 살고 싶다. 하지만 아쉽게도 자신이 할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고,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게,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집단이 이루어지면 미루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소설에서는 저택에서 떠나고 싶어하거나 떠나는 여자들도 있다고 한다. 라우라의 엄마도 그랬다. 거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돌이켜보면 이전에도 라우라는 어머니의 불행한 삶에만 속해 있었다."

    "본래 상속이란 그런 것이다. 가치가 명확한 유산만을 물려받을 수도, 물려받기를 원하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물려받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것을 어떻게든 책임져야 한다."

    왜 제목에 유산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을까 궁금했다. 제목은 소설을 다 읽어야지 이해할 수 있었다.

    "수많은 여자들이 모여 사는 이 저택을 사람들은 카밀라 수녀원으로 부른다. 그렇다. 나는 이제야 겨우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참이다."

    소설은 아이러니하게도 시작하려고 한다면서 끝은 맺는다.

     

     

     

    6. 안과 완의 밤_최영건

    최영건 작가도 내가 처음 읽어보는 작가였다. 이 책은 저택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네. 여기에도 저택이 나온다.

    "어쩌다 이곳이 그 두 가지 용도를 동시에 갖출 수 있었던 것인지는 들을 수 없었는데, 그건 여기가 그런 장소였던 과거가 이야기를 들려주던 안에게도 이미 희미한 시간이 되어버린 탓이었다. 그때는 안도 어렸으니까. 어릴 때의 기억은 원래 희미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완이 여기 온 것은 두렵기는 하지만 안이 봄 밤의 존재를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완은 안이 가직 된 표정을 낯설게 느끼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보려 할수록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부끄러워질 뿐이었다. 물론 완은 안 앞에서 무엇에도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182p는 <합법해적 파르페>가 생각나는 부분이었다. 웹툰과 비슷한 문체와 분위기이다.

    "완은 앞서 걸어나가는 안의 손을 붙잡으려다가 두려움과 애정을 동시에 지나치게 들킬까봐 조심스럽게 그만두었다."

    두려움과 애정을 동시에 들킬까봐 걱정했다니... 이 문장이 너무 좋다.

    "안이야, 네 말대로 유령이 정말 친절할까?'
    "그럼."
    "네가 아니라 나에게도 그럴까?"
    "당연하지."

    "조금 무서워서 뒤따르는 완의 손을 잡고 가고 싶었지만 불안한 진심을 들킬까봐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안도 완의 손을 잡고 싶었구나.

    빛을, 선생님을 발견하고 나서부터는 되게 무섭다.

    "죽음의 시선은 소란한 침묵이었다."

    "밤의 폐허에서는 벽도 바닥도 천장도 경계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완이 남자가 아니였네? 그러면 왜 남자라고 한걸까?

    "완은 언제나 커다랗고 펑퍼짐하고 어디로든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나."

    "그 말들은 서로 연결되어 안을 점점 더 많은 생각으로 이끌었다. 아침이 되어 유령이 사라지더라도 생각들은 그대로 남겠지. 보다 희미하고 불분명한 형체가 되어 전혀 다른 종류의 유령 같은 방식으로 남겨지겠지. 매일 밤 다른 장소에서 가졌던 많은 생각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왜 안을 안아도 아니고 안이야라고 부르는지 궁금했다. 괜히 소리내서 이름을 불러보았다. 완이 그러한 이유로 안이라고 부를지를 몰랐네.

    "아니야,라고 들리는 게 재미있어서."

    "아니야. 안이야. 아니야."

    "친구는 이 이상하고 음산하며 알록달록한 꿈속에서 다시금 잠에 들어버린 것이다."

    "안을 좋아하지 않던 장난꾸러기들이 그림을 훼손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훼손은 안의 그림과 마음을 한꺼번에 변형시켰다. 형태가 변한 마음은 그 뒤로도 복원되지 않았다."

    "밤만이 가능케 하는 연속된 생각들 덕분에 완은 자기가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기 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안을 사로잡으려 하는 무수한 고독의 목소리들을 등지고 둘이서 이렇게 달아나 숨으려고. 숨어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려고."

    '네가 네 마음을 데리고 오다니'

    완은 어쩌면 이렇게 될지를 다 알고 있었구나. 완은 유령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안을 구하러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침이 오니 이곳의 바닥과 벽, 천장은 밤에 비해 환하고 조그맣게 변해있었다."

    "그때는 안도 어렸으니까, 어릴 때의 기억은 원래 희미하게 영원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안이 완을 여기로 데려온 것은 안이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훼손된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해지기 위해. 안과 완의 밤이 너무 좋았다.

     

     


    7. 피스_최진영

    최진영 작가의 책은 <해가 지는 곳으로>랑 <구의 증명>을 보았다. 이 두 책이 같은 작가라니.. <구의 증명>은 좋은 문장은 많았지만, <최선의 삶>과 비슷한 결의 글이었다. 앞으로는 그런 책은 읽지 않기로 다짐했다. 물론 문장도 좋고, 읽는 것을 멈추지 못했지만.. <해가 지는 곳으로>은 정말 좋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가 어떻게 생겼을까. 검색해보고, 헤드윅 노래도 찾아들었다. 퍼즐의 테두리 조각의 직선을 보고 찢어진 아이들의 한쪽면을 생각하다니..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조각을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어떻게 퍼즐 설명서에 이런 말이 있나..

    "우리는 말이 통하나? 같은 언어를 쓰나?"

    "인간의 오만함을 벌하려고 신은 인간의 언어를 쪼개"버렸다는데, 홉과 나는 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는데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멍청이. 중고가 중고인 이유는 포기했기 때문이지.'

    "나는 이야기를 부풀리고 싶었다. 열대우림 같은 이야기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훨씬 힘들고 복잡한 이야기에 빠져서, 임신이나 낙태 따위는 우습게 여기고 싶었다."

    "나는 몰래 본다. 이보배가 화장실에서 죽으려고 했던 날 이후로 나는 이보배의 무엇이든 몰래 봐야만 했다."

    "어떻게든 깨우려고 꼬집거나 때리면 이보배는 눈을 감은 채로 운다. 제발 깨우지 말라고, 눈을 뜨면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고 애원하면서 운다."

    "오필남 선생의 예언 중에는 '여자가'라는 말로 시작한는 게 많았다. 오필남 선생이 여자로 살았기 때문이다."

    "오필남이 은행을 그만두던 해 오필남의 남동생은 사법고시를 준비하겠다며 절에 들어갔다."

    "실제로 신은 이상한 방식으로 오필남 선생을 응원한다. 오필남 선생의 소원을 이뤄주는 게 아니라 불길한 예감을 사실로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오필남 선생은 우리를 경멸하는 방식으로 칭찬했다."

    "우리는 부족하거나 독한 존재였다. 중간은 없었다."

    "내가 태어난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대체 왜 태어났나 생각할 때가 많았다."

    "핏자국이 사라지고 깨끗해졌는데도 거기 뭔가가 있는 것만 같아서 계속 물을 부었다."

    "상관없어 보이는 일들이 상관을 하며 굴러갔다."

    "이보배 때문에 내 마음에는 지옥이 생겼는데."

    "널 구하다가 가위로 내 손가락을 자를 뻔했어. 그때 상처가 내 손에 남아 있어. 눈을 뜨고 내 손을 봐. 모른 척하지 말고 제대로 보란 말이야."

    오필남 선생의 이름은 왜 남자같을까? 남자아이가 태어나길 바라며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마음이 답답해지는 글이었다. 눈물이 날만큼은 아니고 홉의 방처럼 좁고 답답한 느낌이었다.

     

     

     

    8. 숲속 작은 집 창가에서_허희정

    허희정 작가도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작가이다. <실패한 여름휴가>라는 소설집이 있다는데, 제목이 마음에 든다. 읽어보고 싶다.

    "행정기관의 조직도상에는 관리하는 부서도 관리하는 인원의 명단도 적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냥 지시하는 대상이 없는 활자의 연속에 지나지 않았다."

    "숲은 A를 지켜보았다."
    "숲은 A의 행적을 뒤쫓았다."
    "숲은 생각했다. 길을 잃으면 안 될 텐데."

    숲이 지켜보고 뒤쫓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곧이어, 잠에 든다.

    "기쁨 없는 사랑, 기품 없는 애정."

    "아무도 C가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데도, C가 비명을 지르고 괴성을 내뱉고 큰소리로 욕을 해도 아무도 듣지 못하는 어둡고 답답한 숲인데도 C는 조용히 울었다."

    C는 여중생일 것 같다. 아무렇게나 잘린 머리. 부모가 아이를 혼낸다고 멋대로 잘랐겠지.

    "죽지 않는 한, 이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렇게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유령이 되어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순간에 그녀는, 그리고 다른 모든 순간에, 그 누구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저 투명하게 사람들 틈을 지나쳐갈 뿐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유령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사라지는 건 전부 여자들뿐이거든요."

    딱 이 단편 소설 읽으면서 책 제목이 불현듯 떠올랐는데. 지금까지 읽은 책 속의 단편소설들에도 여자들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이상하게 이 소설에서만 책 제목이랑 맞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책 제목이 이 소설 속의 문장이었구나.

    "D가 완전히 어둠 속에 녹아버릴 때까지, 어둠을 이고 걸어다니다가 풀썩 쓰러질 때까지."

    "떠나와서도 떠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그녀 자신이었다."

    "우리 계속해서 미워하자. 절대로 용서하지 말자."

    "검은 것은 금방 떨어졌지만, 이미 축축하게 젖은 부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시간이 흐르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녀가 실종될 줄, 사라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P시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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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릴러 장르의 책은 처음 읽어본 것 같다. 소설 속의 미스터리는 결코 풀리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이 조금 어려웠고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도 많았다. 결말까지 봐도 모호한 부분이 많았다.

    "문학사 안에서 시대마다 정점을 찍은 스릴러들은 사회의 약자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떻게 촘촘한 심리적 착취가 가해지는지를, 그 결과 그들의 내부에서 자라난 기괴한 충동이 굉음과 함께 현실을 찢어내는 순간을 보여주었다."

    <힐 하우스의 유령>도 발문에서 언급되었네. 나 드라마 너무 무서워서 보다 말았는데.. 아무래도 다시 도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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